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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리뷰와 감상

 

 현재 극장가에서 흥행행진 중인 영화 『변호인』에 등장한 문제의 서적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기고자 합니다.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역사에 있어서 지식도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고전과 같은 반열에 오른 이 책을 비판하기보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더 여유가 있다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적용시켜볼 수 있는 사안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쪽의 포스팅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책의 저자 E. H. 카에 대해 소개를 하자면, 카는 189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컬리지를 졸업했으며, 1916년~1936년까지 20여년 동안 외무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그는 웨일스 대학의 교수가 되어 국제정치학을 강의했으며, 1948년 국제연합의 <세계 인권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1953년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정치학을 강의했고, 1955년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가 역사학을 강의했습니다. 이 책은 E. H. 카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엮어서 출판한 것입니다.

 E. H. 카가 살았던 시대(1892~1982)는 제1,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산업화 등 전 세계가 격변의 시기를 거친 시대였고, 이전에 비해 비약적인 속도로 과학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던 시대였으며,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에서 세계가 유지, 균형을 이룬 이데올로기의 시대였습니다. 대부분의 학문이 과학 기술과 마찬가지로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마치 미국과 소련의 양립처럼 다양한 방법론이 존재했을 것이며,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도 그 산물일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와 저자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살펴본 이유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역사가는 그가 속해있는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책의 본문에서 주로 다뤄지는 책의 골자이며, 이 책을 읽을 때에도 적용되어야할 바람직한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1장 역사가와 사실


 19세기는 사실을 매우 존중하던 시대였다.

 『고된 시기』(찰스 디킨스의 소설)의 주인공 그래드그라인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사실뿐이다."

...

 역사적 사실의 지위는 해석의 문제에 의존한다. 이 해석의 요소는 역사상의 모든 사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은 우리를 위해서 미리 선택되고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우연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의식적인가 아닌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어떤 특정한 견해에 완전히 물든 사람들이 확언하는 사실이야말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서다.


7~14p

 

 카는 19세기가 사실을 매우 존중하던 시대였다고 밝혔습니다. 1장은 이에 대한 반박, 즉, 역사에서 완전히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역사가도 그가 속해있는 시대의 환경, 관점,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해석가로서의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하다보면 결국 객관적 역사가 배제되고, 역사는 역사가 만들어내는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에 대해 카는 다시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산의 모양이 달라 보인다고 해서 산은 원래 객관적으로 형태가 없다든가, 무한한 형태가 있다든가 할 수는 없다. 역사상의 사실을 설정할 때 필연적으로 해석이 작용한다고 해서, 또 현존하는 해석이 어느 것이고 완전히 객관적이 아니라고 해서 어느 해석이든 차이가 없다든가, 역사상의 사실은 원래 객관적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사실을 존중해야 하는 역사가의 의무는 그 사실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는 알려져 있는 것이거나 알려질 수 있는 것이거나, 자기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나 기도하고 있는 해석과 어떤 의미에서나 관련된 사실을 그려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32~33p

 

 카가 말하는 훌륭한 역사가란 완전히 객관적인 사실을 찾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의 필연적인 주관적 속성을 이해하고, 역사가 자신 역시 자신이 속한 시대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지하여 그 마저도 해석에 녹여내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즉, '인간이란 결코 완전히 환경에 휘말려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환경에 순종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된 것도 아니고, 그 절대적인 주인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결국 시대가 변화하면서 역사가의 관점 역시 변화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그가 써내려가는 역사 또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1장의 마지막에 카는 지금은 유명한 말이 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2장 사회와 개인

 

 2장에서는 역사가와 역사 속의 위인들을 포함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 사회 속에 존재하는 개인에 대해 설명이 이어지며, 1장에서 언급되었던 '시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역사가'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는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하여 우리를 단순한 생물적 통일체에서 사회적 통일체로 바꾸어 간다. 역사시대이거나 선사시대이거나 어떤 단계의 인간이든 태어나면서 하나의 사회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며, 그 순간부터 벌써 이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구사하는 언어는 개인적인 유전이 아니라 그가 성장하는 집단으로부터의 사회적 획득이다. 말과 환경은 상호간에 그의 사상적 성격을 결정하는 데 기여하고, 그가 유년기에 품는 관념은 타인에게서 획득한 것이다.


37~38p


 개인숭배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르네상스 이전에는 '인종, 종족, 당파, 단체의 일원이라는 자각' 밖에 없었던 인간이 르네상스 이후로는 '정신적인 개인으로서의 자각'에 이르렀고, 이것은 긴간 진보의 기본 경향이었습니다. 중세 이전과 달리 현대의 인간은 집단 혹은 사회적인 의무나 역할과 개인으로써의 가치나 권리 사이에 갈등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사회혁명이나 변혁에서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나 싸움은 없었으며, 모든 혁명은 개인 대 사회의 갈등의 결과물이 아닌 집단과 집단 간의 투쟁의 결과물이라고 카는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 또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 사이의 긴장을 추상적인 용어로 표현할 때, 이 추상적인 관념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이것은 개인 자체와 사회 자체의 투쟁이라기보다는 사회 속에 있는 여러 개인의 집단과 집단 사이의 투쟁이며, 어느 집단이건 자기에게 불리한 사회정책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41p


 현대사회에 비추어봐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혹은 개인으로써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부당함을 타파하기 위한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많은 투쟁들이 내막을 들여다보면 특정 집단 간의 갈등인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결국 역사가도 한 명의 개인이며, 그는 다른 많은 개인과 똑같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자 그가 속한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사회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대변인이라고 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역사의 과정을 '움직이는 행렬'로 논한다. 그 비유는 그런대로 괜찮다. 다만 역사가가 그 비유에 이끌려 깎아지른 바위 끝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독수리나 발코니에 서 있는 거인이라도 된 듯이 여기는 일이 없다는 전제하에 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다. 역사가도 같은 '움직이는 행렬'의 어느 한 부분에 끼여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놓고 있는 또 하나의 희미한 그림자 인물에 불과하다.

 그런데다가 행렬이 꾸불꾸불 좌우로 굽고 때로는 다시 되돌아가고 해서 이 행렬의 여러 부분의 상대적인 위치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예컨대 1세기 전의 증조부보다 오늘의 우리가 중세와 더 유사하다든가, 카이사르의 시대가 단테의 시대보다 현대와 더 유사하다든가 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이다.

 역사가가 서 있는 행렬 속의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하는 것이다.

...

 자기의 사회적 및 역사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은, 자기가 그 상황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가를 인정하는 감수성 여하에 영향받는 것으로 생각된다.

...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런 이중적 안목으로 역사가를 비중 있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42~53p



 어떠한 개인도 사회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역사가와 역사가의 역할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한다는 E. H. 카의 논지는 역사상에 등장하는 위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바꿔 말하면, 역사를 쓰는 개인인 역사가가 사회에서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는 것처럼, 역사의 대상이 되는 개인인 위인들 또한 사회에서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상의 사실은 분명 여러 개인에 관한 사실이지만, 고립된 개인의 행위에 관한 사실도 아니고, 진실이건 가공이건 여러 개인이 스스로 행위의 동기라고 부른 것에 관한 사실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의 여러 개인의 상호작용에 대한 사실이며, 또한 여러 개인의 행위로부터 그들 자신이 의도한 결과와는 다른, 때로는 반대의 결과마저 낳는 사회적인 여러 힘에 관한 사실인 것이다.

...

 역사에서의 위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위인도 한 개인이기는 하지만, 탁월한 개인이므로 동시에 탁월한 중요성을 가진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번은 말했다. "시대가 뛰어난 인물에 맞아야만 한다는 것, 즉 크롬웰이나 레츠 같은 천재도 오늘날이었다면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한 진리이다."


63~65p

 

 E. H. 카는 역사적 사건들을 한 개인 혹은 위인의 내적인 동기나 결정, 우연한 개인적인 사건으로 돌리는 역사관을 경계했으며 "어떤 시대의 위인은 그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고, 시대의 의지를 그 시대에 알려서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그의 행위는 그의 시대의 핵심이자 본질이다. 그는 그의 시대를 실현한다."라고 한 헤겔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다시 위인에 대해 정의를 내렸습니다.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면서 대행자이고, 동시에 세계의 양상과 인간의 사상을 바꾸는 사회적 여러 힘의 대표자이며 창조자인 뛰어난 개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

 

 카는 3장에서 우선 역사와 과학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카는 기본적으로 연구의 방법과 학문의 발전 방법에 있어서 역사는 과학과 유사성을 띈다고 밝혔습니다.


 과학자들이 발견을 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어내더라도 그것은 엄밀하고 포괄적 법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에 대한 길을 개척하는 가설을 제시함으로써 뜻을 이루는 것이다.

...

 모든 사고는 관찰에 의한 어떤 종류의 전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이 전제는 과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이 사고에 비추어서 수정되는 것이다.

 이런 가설은 어떤 문맥이나 목적에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문맥이나 목적이 달라지면 무효가 된다. 어떤 경우이든 이런 가설이 실제로 새로운 통찰의 촉진과 우리의 지식 증대에 효과가 있는가의 여부를 경험적으로 테스트하는 것이다.


72p


 역사든 과학이든 어떠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가설과 일반화를 통해 발전하며, 주체와 객체가 상호작용을 하여 가설은 항상 수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객체가 변화하여 다시 주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과는 또 다른 특수성을 지닙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이 분석이나 예측의 대상이 되어 있을 경우,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의 예측에 의해 미리 경계할 것이고, 따라서 그것으로 자기의 행동을 바꾸어, 그 예측이 아무리 올바른 분석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빗나가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의 반복이 어려운 이유의 하나는, 두 번째 상연 때는 등장인물들이 첫번째 상연의 대단원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의 행동이 이 지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87p


 도덕과 관련해서 카는,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경계하며, 더 나아가 역사의 사건에 있어서도 이에 대해 역사적 맥락 이외의 도덕적 잣대, 이를테면 종교적인 규범이나 철학적 신념같은 것을 적용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유일한 논점은,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기준을 세워서 그것이 역사적 행위를 심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나 좋건 싫건 이런 기준 속에 자기 자신의 역사적 조건과 소망에 알맞은 특수한 내용을 담아보는 것이다.

...

 이상은 역사적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판단의 길잡이가 될 초역사적인 표준이나 기준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직한 비판이다. 이런 기준이 신학자들에 가정된 어떤 신성한 권위로부터 나온 것이든, 아니면 계몽시대의 철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동의 이성이나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든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기준의 적용에 결함이 생겼다든가, 기준 그 자체에 결점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준을 세우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비역사적이고, 역사의 본질과 모순된다. 이것은 직무상 역사가가 끊임없이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독단적인 해답을 주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미리 어떤 해답을 받아들인 역사가는 자기 눈을 가리고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며, 자기의 직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

 어느 집단이나 그 역사에 뿌리박은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어느 집단이든 이질적이고 부당한 가치의 침입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이것을 부르주아적이고 자본주의적이라든가, 비민주적이며 전체주의적이라든가, 더 심하게는 비영국적이라든가 비미국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낙인을 찍는 것이다.

...

 내가 제안하려는 구제책은, 우리의 역사 수준을 높이는 것, 역사를 보다 과학적으로 만들고, 역사 연구가들에 대한 우리의 요구를 더 엄격하게 하는 것이다.


102~104p

 

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E. H. 카가 말하는 진정한 역사가란 자기가 만든 도표를 들여다보는 동안에 이 표를 정리하고 여러 원인의 상호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어떤 계통질서를 설정하며, 가능하면 어떤 원인들 사이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것을 원인으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고자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역사가가 어떤 원인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그가 어떤 역사가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역사란 실재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인과적인 태도의 '선택적 체계'이다.

 역사가가 자기의 목적에 맞는 의미있는 사실을 드넓은 사실의 바다에서 가려내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인과의 연속, 그것만을 무수한 원인과 결과의 연쇄 속에서 뽑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의미의 기준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논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틀 속에 사실을 넣어 맞추는 그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우연적인 것으로서 배척되는 것은, 원인과 겨과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연쇄 그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이런 연쇄를 처리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 해석으로도 감당할 수 없고, 과거나 현재로 봐서 무의미한 것이다.

...

 뛰어난 역사가들은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미래에 대해 깊이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역사가는 '왜?'라는 물음 이외에도 '어디로?'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다.


131p


5장 진보로서의 역사


 현대의 인간이라고 해서 5천년 전의 조상보다 더 큰 뇌수를 가진 것도 아니고, 선천적으로 뛰어난 사고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사고는 그 뒤의 여러 세대에 걸친 경험에서 배우고, 그것을 자기의 경험 속에서 통합했기 때문에 그 유효성이 몇 배나 늘어난 것이다.

 획득형질의 유전은 생물학자들이 부정하는 것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진보에 있어서는 기초가 된다. 역사라는 것은 획득된 기술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됨으로써 이루어진 진보를 말하는 것이다.

...

 역사가에게 있어서 진보의 목적은 이미 진화된 게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끝없이 먼 곳에 있으며, 그 표적은 우리가 더 전진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145p

 

 위에 인용한 글의 내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카는 역사의 진보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성이 일직선 상을 향하고 있거나,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카의 설명입니다. 즉, 어떤 시기에 문명의 진보를 위해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집단이 다음 시기에도 유사한 역할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집단은 그 이전 시대의 전통, 흥미, 사상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어서 다음 시대의 요구나 조건에 스스로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모든 사람에게 다 평등하고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또 그럴 수도 없다, 어떤 집단에게는 몰락의 시대로 보이는 것이 다른 집단에게는 새로운 진보의 시작으로 보이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과정에서 보았을 때, 혹은 장기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회는 새로운 목표의 점진적인 출현에 따라 진화해가므로 결국 역사는 진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요 목표가 입헌적 자유 및 정치적 권리의 조직화라고 생각했던 시대에는 역사가는 과거를 입헌적 및 정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런데 경제적 및 사회적인 목적이 입헌적 및 정치적인 목적을 대신하기 시작하자, 역사가는 과거를 경제적 및 사회적으로 해석하였다.

...

 어느 것이든 그 시대에는 진실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및 입헌적인 목적에 대한 관심보다 경제적 및 사회적인 목적에 대한 관심이 인류 발전의 더 넓고 더 진보된 단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의 경제적 및 사회적인 해석은 정치적 차원에서의 해석에 비해서 더한층 발달된 단계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역사 기술은 그 자체가 진보하는 것이고, 그것이 여러 사건의 진로에 대한 끊임없는 통찰로 넓이와 깊이를 마련하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진보하는 과학이다.


155~156p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진보이고, 진정한 의미의 역사는 역사 그 자체에서 방향감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다는 것이 카의 견해입니다.

 "미래를 향해서 진보하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버린 사회는, 곧 과거에 스스로 이룩한 진보에 대한 관심도 상실할 것이다."


6장 넓어지는 지평선


 20세기 중엽의 세계는, 아마도 15, 6세기에 중세 세계가 붕괴하고 근대 세계의 기초가 확립된 이래 이 세계를 엄습한 그 어떤 변화과정에 비해, 더욱 심각하고 더욱 광범위하다고 생각되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 결국 이 변화가 과학상의 발견이나 발명의 결과이고, 그 끊임없이 확대하는 응용의 결과이며, 직접 간접으로 거기서 생기는 발전의 결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현대는 모든 시대 가운데서 가장 역사의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현대인은 자기가 지나온 어둠을 뒤돌아보고 열심히 응시한다. 그것은 거기서 비쳐오는 희미한 빛이 그가 나아가려고 하는 암흑을 비추어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168~169p



 6장은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하고 저자가 살고 있는 시대를 조명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에 적용해보면 가장 이질적인 부분이 많은 단원같기도 합니다. 우선 위에 인용한 내용을 보면 카가 살고 있는 '현대'는 심각하고 광범위하다고 생각되는 변화의 과정에 있으며, 모든 시대 가운데서 가장 역사의식이 발달한 시대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현재 21세기는 그와는 다릅니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카와는 달리 전쟁의 시기와 격변의 시기를 겪지 않았으며, 생존경쟁에 치여 역사의식은 과거에 비해 높지 않을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거나 3D프린터가 개발되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혜택을 보고 있지만, 이데올로기의 한 축이었던 소련이 무너진 뒤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일부 소수의 학자들의 몫입니다. E. H. 카는 소련이 붕괴되기 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양분된 세계에 살고 있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책이 과거 금서였던 이유도 이러한 내용(그와 더불어 기본 제도에 대한 도전을 장려하는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다시 본 맥락으로 돌아와서 현대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을 아래에 첨부하고자 합니다.


 전문적인 광고업자나 선거운동 지도자에게 우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존하는 사실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단지 최종 결과에 비추어보아 소비자나 유권자가 지금 무엇을 믿고 또 바라고 있느냐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소비자나 유권자를 능숙하게 조종하여 그들이 무엇을 믿고 또 바라도록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대중심리의 연구를 통해 자기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객이나 유권자의 심리 속 비이성적인 요소에 호소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전문적인 기업가나 정당 지도자 등 엘리트가 전례 없이 발전된 합리적 과정을 통하여 대중의 비이성적 요소를 이해하고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광경을 보는 것이다.

 호소는 이성을 겨냥하지 않고 대부분 오스카 와일드가 "지적인 것보다 낮은 것을 노린다."고 말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

 어떤 사회나 지배적인 집단은 다소간에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대중의 의견을 조직화하고 통제하는 법이다. 이 방법은 이성의 남용을 낳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방법보다 나쁘게 생각된다.


183p


 이런 내용은 어떤 정치세력이나 정당을 막론하고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며, 반대로 반대편을 공격하기 위해 이용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과학 등에 있어서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본 포스팅에서 그동안 접하고 고민해왔던 다양한 사안들에 대한 고찰과 견해를 함께 풀어내고자했지만, 본문의 인상깊은 구절을 소개하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버려 그러한 내용은 아쉽지만 다음 포스팅으로 미뤄야할 것 같습니다.

 "과학이든, 역사든, 사회든, 인간 현상의 진보는 단순히 인간이 기존 제도의 단편적 개량을 구할 뿐만 아니라, 이성의 이름으로 현존 제도에 대해서 근본적인 도전을 시도하는 어려운 각오를 통하여 이룩되는 것이다."



위의 글은 2014년 1월 17일 네이버 블로그에 직접 게재했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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