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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다 읽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대략 추려서 생각해보자면, 첫째로는 유발 하라리의 인간과 삶에 대한 시각 또는 철학이 제 자신의 것과는 다소 배치된다는 점, 둘째로는 방대한 인간사에 대해 하라리가 제시하는 논거가 일관되지 못하다고 느낀 점, 셋째로는 책의 내용에서 (책 전반에서 부정하고는 있지만) 의심되는 서구 제국주의적 시각에 대한 거부감 등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독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관적인 부분이기는 하나, 책에 대한 감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므로 먼저 조금 더 자세히 짚어보겠습니다.

 

 

 하라리는 인간이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하기까지의 과정은 완전히 우연의 법칙에 의해 일어났으며 방향성 없이 진행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와 진화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는듯한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시간을 되돌려 생명이 출현한 당시로 돌아가서 다시 시간을 재생했을 때 인간이 현재와 똑같은 형상을 갖추게 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는 '입'이라는 기관을 예로 들어, 입이 현재와 같이 의사를 전달하고, 맛을 보며, 키스와 같은 행위를 통해 애정을 표현하는 기관으로 진화한 것은 우연에 의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한의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현재 서구의 학문적 패러다임의 한계라고 느껴진 부분인데, 각각 기능의 계통적 관계에 대한 고찰은 그의 시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적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학문(철학)적 시각을 배제하더라도, 인간이 아무런 방향성 없이 진화했다는 하라리의 주장은 후반부에서 인간의 역사가 일정한 방향대로 흘러왔다는 그의 주장(239p, 336p)과는 이질적이게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방향도 없이 진화한 인간이 만든 문화와 역사가 그 주체와는 달리 특정한 방향으로 진행해왔다는 내용은 통합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 외에도 이야기의 전후에서 사용되는 논리가 일관되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많습니다. '상상력'을 강조하다가도 어느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은 듯한 내용이 보이기도 하고, 당연한 변인을 삭제해버리는 경우도 눈에 띕니다. 가령, 농업혁명 이후로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지위를 차지하거나 부계 사회를 형성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으로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로 남자들의 육체적 힘은 쇠약해진 60대의 사람들이 20대에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관건이 아니라는 점, 전쟁을 치르고 병사가 되는 것은 남자의 역할이지만 그것들을 조종하는 것이 꼭 남자일 필요는 없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60대의 남자가 그동안 축적한 재력과 권력에는 다른 건장한 20대 남성들을 부릴 수 있는 힘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자들이 이해심과 공감능력이 우월하다 하더라도 전쟁을 치른 남성을 조종하기 쉬운 사람은 함께 전쟁을 치렀다는 유대감을 공유한 남성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그가 강조해온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태본 것들이긴 합니다. 그리고 그 '상상력'을 조금만 더 발휘하면, 농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농사를 도울 일손의 중요성이 커지고, 그에 따라 여자의 출산의 기능이 중요시되면서 남녀의 역할 구분이 명확해졌을 것이라는 추론도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기타 사례들은 흐름상 제외하고, 하라리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들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라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342p). 어떤 이는 역사를 통해서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고자 노력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과거를 통해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라리는 위의 시각을 가지고서 역사는 '정의'의 원칙을 따라 흘러오지 않았음을, 그리고 어떤 나라도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고, 그 혜택을 누리고 있음을 별문제의식 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간사에서 대부분의 발전은 제국의 통치와 결정 아래 이루어졌으며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국의 정복을 통해 하나의 국가로서 통일을 이루고 발전해온 인도를 예로 들며, 기본적으로 역사에서 선악의 판단은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이어갑니다. 그에 따르면 지구촌의 모든 문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진보를 이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바꾸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살인과 같은 범죄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든 행해졌고,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그 피해를 입었지만, 한 편으로는 식구(食口)의 감소로 인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살인은 필연적이었고 그 잘못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러한 역사에 대한 선악의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한 것인가?', '우리 모두가 악하다면, 악은 더이상 악이 아닌가?'.

 한 보 물러나서 만약 문명 혹은 문화가 오직 제국을 통해서 발전해왔다고 인정한다면, 하라리가 이야기한 '밈meme'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책에서 서술한 밈에 대한 내용에 의하면, '문화는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이론에 따르면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 데 뛰어난 문화'라고 합니다. 문화에 이렇게 자기 복제적 성격이 있다면, 제국의 침탈 없이도 성공적인 문화는 결국 퍼져나갔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국이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면, 거대한 제국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주도권을 내준 중국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하라리는 유럽의 약진에 대해서 근대화 이전부터 유럽인에게는 과학적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문제점을 종합하여 이야기해보자면, (그것이 의도적이었는지 비의도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피엔스』에서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개념들이 뭉뚱그려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질적 차이의 개념이 강조된 문화와 양적 수준의 차이가 강조된 문명이 '문화'라는 단어로 통칭되어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한 듯한 인상을 주며,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함께 등장한 모더니즘과, 그 이후 그에 대한 회의와 함께 부상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분되어 서술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는 특히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런 변화는 경제, 과학, 예술 등 인간을 둘러싼 전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경향이기 때문입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자체만으로는 실패하여 정부 개입의 중요성이 증대되었고, 물리학에서는 뉴턴의 이론 이후 아인슈타인과 양자 역학이 등장하여 그 범위가 인간이 지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예술에서도 추상화가 등장하여 이성의 영역 저편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인간의 감정이나 행복과 관련하여 세로토닌과 같은 호르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든지, 욕망을 설계한다는 등의 내용을 보면 유발 하라리는 『과학한다는 것』의 저자 에른스트 피셔가 이야기한 '고체 패러다임'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물 현상의 기원을 DNA와 같은 고체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런 입장은 아인슈타인보다는 뉴턴의 물리학에 더 가까우며, 다분히 모더니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피엔스』의 리뷰를 작성하고자 마음먹은 것이 비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지평을 넓혀주고자 하는 하라리의 바람대로, 『사피엔스』는 '인간'에 대해 그동안 몰랐던 여러 가지 사실을 알려주며 인식의 경계를 확장시켜줍니다. 하라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농업혁명은 전체 인간의 역사 중 비교적 최근에 일어났으며, 그전까지 인간은 들과 산에서 수렵생활을 했고, 그 습성들은 여전히 인간에게 남아있습니다. 일례로,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탐식하게 되는 데에는 이동 생활을 하면서 과일과 같은 식량을 한꺼번에 먹어 에너지를 비축해두고자 했던 인간의 습성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인간 무리들의 생활도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무리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겠지만, 적개심이나 비웃음을 받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며, 무리에서 뒤쳐진 노인이나 장애인은 죽음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아기는 흔히 살해되곤 했다는 대목을 보면, 막연히 원시의 삶은 지금보다 따뜻하고 친밀했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동안 '인간적이다'라고 했던 표현 등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농업혁명이 가져온 변화도 시사해주는 바가 큽니다. 농업혁명을 통해 '공간'은 축소되고, '시간'의 영역은 확장되었으며(151p), 흉년과 흉작을 대비하기 위해 미래를 의식하고 예측하는 일이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농업혁명을 통해 인간은 정착하고 안정을 찾게 된 것 같지만, 실상 과거에 비해 노동의 시간은 늘어났으며, 개인이 차지하게 되는 몫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일상에서 일의 비중이 늘리고, 여가 시간은 줄이면서 농업 혁명은 최초로 현대 사회의 원형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라리는 여가 시간은 대폭 감소시키고 인간의 삶 대부분을 노동에 투자하게 만든 농업혁명을 사기라고 비유했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미래에 닥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의 형태, 영생을 사는 인간의 출현에 대한 가능성을 제기한 부분 또한 큰 생각거리를 안겨줍니다. 인간이 만약 죽지 않는 삶을 살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종교나 철학, 의학 등은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 질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까지 과학이 늘 인간의 상상 범위를 뛰어넘어 발전해온 것을 떠올려 본다면, 생물학과 유전공학의 발전에 힘입어 무한의 삶을 살게 되는 인간이 출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라리가 얘기한 대로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철학적, 종교적 논쟁은 아무런 의미 없는 것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위에서 꽤나 길게 책을 비판한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저는 거시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회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그렇게 믿는 개인들에 의해 움직여져 왔다는 개인적인 시각을 고수하려 합니다.



위의 글은 2018년 2월 22일 네이버 블로그에 직접 게재했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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