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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상징』 : 대극의 통합


 만류인력의 발견, 전기 및 전구의 발명 등 과학사에 변화를 가져온 수많은 사건들은 특별한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과학의 발전사를 살펴보면, 그러한 사건들은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는 이루어졌을 필연적인 결과물들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일 견해일 것입니다. 가령 뉴턴이 이 생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또다른 선구자가 기존의 지식들을 토대로 같은 법칙을 언젠가는 발견했을 것이고, 에디슨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현대의 도시는 여전히 휘황찬란하게 밤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건들이 수십년 혹은 수백년씩 늦게 발생하면서 현대의 사회가 여전히 전근대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과학은 여전히 어떤 한 방향을 향해 발전해나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예술은 상대적으로 일관적인 흐름에서 자유로울 것처럼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고흐가 없었다면 눈물에 젖은듯 요동치는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작품을 볼 수 있었을까하는, 혹은, 피카소가 미술을 하지 않았다면 현대의 미술작품들은 지금과 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독창성과 관련된 특성 때문에 '예술가'라는 칭호에는 여타의 직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지위가 부여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서양의 전설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용의 이미지라든지, 예술작품이나 건축물에서 완전함을 상징하는 원의 형태, 지구촌 어디서나 동일하게 사용하는 은유법(이를테면 시에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우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지구 반대편의 원시 부족에서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우물에 빗대어 표현한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과 같은 경험)과 같은 현상들은 예술 역시 '인간'이라는 굴레 안에서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경향성 혹은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알려줍니다.

 


 칼 융은 ​누군가가 가르치지 않아도 태초부터 존재하는 인간의 내적인 경향성을 '원형(archetype)'으로 설명합니다. 원형에는 본능적인 '경향성(trend)'이 있어서 새가 집을 짓는 충동이나 조직적으로 무리를 이루는 개미의 충동만큼이나 뚜렷한 나름의 충동을 지닙니다(100p). 이 원형은 과거에 전혀 접촉한 경험이 없는 원시 문명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역사나 환경을 지니지 않은 사회들 사이에서도, 즉,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언제나 되풀이해서 나타납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예술작품에서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 원형들 중 하나는 위에서 언급했든 완전함을 상징하는 원의 이미지와, 이것이 네 방위로 분할된 '4위성(四位性)', 즉 4라고 하는 요소입니다. 이 4위성은 예술 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나 철학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의학, 건축학을 비롯한 수많은 분야에서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잠시 '원'으로 돌아가면, 폰 프란츠 박사는 원(혹은 구체)를 <자기>의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원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포괄하면서 다각적이고 다면적인 마음의 전체성을 표현합니다. 원의 상징은 원시인의 태양 숭배나 현대 종교, 혹은 신화나 꿈, 티베트 승려가 그린 만다라, 심지어 도시 계획도에도 나타나고, '인간'을 '소우주'로 보는 동양철학 혹은 한의학의 '태극'과도 의미가 통합니다.



 뒤엉킨 9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얀트라(만다라의 한 형태). 전체성을 상징하는 만다라는 신화나 전설에서 예외적인 존재의 이미지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동양에서 볼 수 있는 명상도는 대부분 ​순수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얀트라(yantra)'라고 부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얀트라 모티프 중 하나는 꼭지점이 위를 향하는 삼각형과 아래로 향하는 삼각형이 뒤엉킨 채 원 속에 들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시바와 샤크티, 즉 남신과 여신이 일체가 되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상징은 대극성의 통합, 즉 개인적이고 시간적인 자아 세계와 비개인적이고 비시간적인 비(非)자아 세계의 통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통합은 모든 종교가 목표로 삼고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 세계와 비자아 세계의 균형 혹은 통합에 대한 내용은 이제마의 사상의학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종교화에 자주 그려지는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후광에서도 우리는 만다라를 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후광은 대개 네 갈래로 나뉘는데, 이것은 사람의 아들로서의 고뇌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분화된 정체성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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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미술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상징은 만다라가 아니라 십자가, 혹은 그리스도의 수난상이다. 십자가도 카롤링거 왕조 시대까지는 등변형 십자가, 혹은 이른바 <그리스 십자가>인 것이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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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는 예술과 철학은 물론 과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변화를 일으키지만 기독교의 중심적인 상징은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날까지도 그렇듯이, 여전히 라틴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종교인의 마음의 중심이, 쉽사리 자연으로 돌아가버린 세속적인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에 견주어 보다 높고 정신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기독교 정신과 합리적, 혹은 지적인 마음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 시대 이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은 이 균열은 한 번도 메워져 본 적이 없다.


372~378p

 

 융 박사는 인간의 의식을 관찰, 연구하여 이를 크게 네 가지 기능(사고, 감정, 직관, 감각)으로 설명했는데, 이 기능은 인간이 내적, 외적으로 받고 있는 세계에 관한 인상을 처리하기 위해 구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이 자기의 경험을 이해하거나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동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네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경험에 반응하는 것도 이 네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전부터 나는 많은 사람들이 되도록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거나, 이성을 쓰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미련하게 쓰고 있다는 사실에 큰 인상을 받아 왔다. 또, 나는 이지적이고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들이 전혀 자기의 감각 기관을 사용하지 않는 데 놀랐다. 그들은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채, 귀에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채, 느끼면서도 촉감을 모르는 채, 먹으면서도 맛을 느끼지 못하는 채 살고 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의 신체 상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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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을 쓰는 사람이란 곧 <사고하는 사람> - 자기 자신을 타인이나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해 지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사람 - 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능이 있는데도 사고하지 않는 사람들은 <감정>을 통해 적응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들이었다. <감정>이라는 말은 약간의 설명을 요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센티먼트(sentiment)>와 관계가 있는 것을 <감정>이라고 말한다. 이 <감정>이라는 말은 의견을 나타낼 때도 쓰인다. 가령, 백악관에서 나오는 성명은 <대통령께서 느끼시기로는...> 하는 식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내가 <사고>에 견주면서 이 <감정>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어떤 가치 판단(마음에 든다든지 싫다든지,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개념의 정의에 따르면 감정은 정서(emotion)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감정>은 사고나 마찬가지로 <합리적인>(즉 질서를 부여하는) 기능이지만 직관은 비합리적인 (무언가를 감지하는) 기능이다. 직관이라는 것은 하나의 <육감>이기 때문에 의도적인 사고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니까 판단 작용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내적 외적 상황에 좌우되는 비의도적인 것이다. 직관이라는 것은 감각 지각(sense perception) 같은 것인데, 이 감각 지각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이 아닌 신체적인 요인에 의한 외적 자극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비합리적이다.

...

 <감각>은 우리에게 어떤 것의 존재 여부를 알려 주고, <사고>는 그 존재하는 것의 정체를 알려 주며, <감정>은 그 존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알려 주며, <직관>은 그 존재하는 것이 어디에서 유래하여 어디를 지향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86~87p​

 


 정신의 <나침반>.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사람을 보는 융 학파의 심리학 방법 중 하나이다. 나침반의 각 점에는 각기 대극(對極)이 있다. <사고>형 인간에게 이 대극은 비교적 발달이 더딘 <감정>일 것이다. ... <감각>형 인간의 경우, 사고와 감정이 같이 승(承)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사고 및 감정의 대극인 <직관>은 가장 약한 면모를 보인다.

 

 칼 융의 네 가지 인식 기능(사고, 감정, 감각, 직관)과 이 기능들의 대극성을 나타내는 '정신의 나침반'은 (자아와 비자아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제마의 사상의학에서 놀랍도록 유사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즉, 이 땅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사고'는 소음인의 선천적 기능인 '지방(地方)'과 유사하며, 합리적인 사회적 가치판단의 기능을 수행하는 '감정'은 소양인의 선천적인 기능, '세회(世會)'와 통합니다. 보편적인 혹은 정상적인 삶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감각'은 태음인의 '인륜'과 비슷하고, 존재하는 것이 어디에서 유래하여 어디를 지향하는가를 알려주는 '직관'은 곧 태양인의 '천시(天時)'를 위한 것입니다. 이제마 역시 대극성의 균형에 주목하여 대극에 존재하는 열등한 기능이 깨질 때 건강의 이상이 초래되는 것으로 보았고, 열등한 기능을 강화하여 대극의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독행'과 '박통'이라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가 처음으로 주장했던 4원소설에 근원을 둔 4체액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점액질, 다혈질, 우울질, 담즙질.
- 4액체설은 모두 액체라는 '물질'로 환원되기 때문에 사상四象을 형성할 수 없다.]

 

 (사서삼경 중 하나인 <주역>을 참고했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발생한 칼융의 사상과 이제마의 체질의학에 등장하는 인간 의식기능의 원리가 이렇게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어떤 한 독창적인 선구자에 의해 고안된 창작물이 아니라, 과학사에서 등장하는 필연적인 사건들처럼 언젠가는 규명되었을, 인간 내부 깊숙이서 작동하는 자연의 법칙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위의 글은 2015년 5월 28일 네이버 블로그에 직접 게재했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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