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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한다는 것』 : 진화적 관점에 대해


 피셔의 진화론에 대한 입장은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 역할을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을 채택함으로써 기존의 현상을 오류 없이 잘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연구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진화론에 대한 몇 가지 특정 사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진화의 개념을 어떤 특정한 '상태'에 기원하여 또다른 '상태'에 이른 정지적 관점이 아닌 '항상 변화하고 있는 상태', 즉, 동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것과 진화가 곧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후자의 내용은 굴드가 주장한 것으로 피셔는 이에 대해 '공감'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서양적인 세계상 속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질로서 변화를 가장 밑바탕에 두는 관점은 인정할 수 없는 사상이다. 서양적 사고는 그런 존재의 본질로서 변화 대신 변화를 일으키는 불변하는 원인이나 확고한 형태를 찾으려고 한다.


363p


 이제 뉴턴 이후 3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서구 사상은 여전히 정지 또는 불변이 존재의 근거고, 운동은 설명되어야 하는 현상이라고 파악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뉴턴을 바탕으로 한 사상사를 전환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정지가 아닌 운동이 존재의 근원이자 모든 존재의 시작에 놓여야 한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 왜 진화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게 된다. 왜 우리는 진화 개념처럼 '변화'를 움직이는 세계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가?

...

 내가 생각하기에 세계는 이렇게 동적이고 무규정적인 형태로만 출발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은 내재적인 모순이 없으며 세계와 우리 인간의 본질에도 상응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세계는 변화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태초에 진화라는 운동이 있었고, 현대 과학은 이 현상을 어떤 계획이나 원인도 없이 진행된다는 의미에서 '특이성'이라고 한다.


364~365p


 진화란 인간을 만들어 내는 이론이 아니라 인간이 발생되는 과정(개체 발생)에 대한 이론이다. 즉 진화라는 운동은 진화 과정을 발생시킨다. 그런데 이 과정은 정확하게 말해서 진화 운동 자체와는 구분된다. 진화 과정은 원인 없이 우연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좁은 의미에서 '발생적인') 유전자에 따라 인도되고 조종된다. 이때 유전자들은 결코 독립되어 작용하지 않고 주변 환경에 반응하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외부 변화를 내부로 받아들이는 세포가 만들어 낸다.


366p


 굴드가 자신의 책 <진보라는 환상Full House>에서 진화의 다양한 방식에 관해 썼는데, 이 책이 바로 이런 생각, 즉 진보라는 관점에서 진화를 해석하는 경향에 강하게 반대를 표명한다. 이 책에서 그는 종으로서 인류는 박테리아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나타난 단순한 거품에 불과하며, 그것은 진화의 과정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학문적인 논증에 필요한 최소한의 증명 자료를 대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 지칠 줄 모르고 역설하는 것들이 있다. 즉 진화의 시계를 인류가 나타난 때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우리 같은 생명체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진화의 흐름에서 동일한 생명현상이 반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인류의 출현은 진화의 우연적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역사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리고 생명의 역사에서 방향을 잡고 우리 인류의 속성들을 사전에 규정하는 듯 보이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진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로서 진보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틀린 해석이다.


371~372p


 피셔는 굴드의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원론적으로 생물학자 도브잔스키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현상을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는 생물학에서 그 어떤 의미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피셔는 우선 의학 분야에서 진화론적인 관점을 받아들임으로써 질병과 건강에 대해 더 잘 이해할 가능성을 열게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이미 진화론적인 의학에서 많이 논의되는 새로운 과학적 관점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관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선 자연도태가 아무 흠도 없는 완벽한 해결책이라는 오래된 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자연도 끊임없이 타협하며 비용과 유용성을 가늠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이 개체 수를 가장 알맞게 늘리기 위해, 즉 다음 세대에 나타날 적합한 유전자의 수를 가능한 한 늘리기 위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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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적의 재생산 상태는 과학적으로 이해해 볼 때 결코 개체들의 최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후손들의 숫자다. 최적의 재생산 상태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확산 단계를 끝낸 생명현상의 말기(노후)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하지만 재생산 단계에서는 아주 유용하고 최적 상태에 공헌하는 유전자를 생각해 보자. 이런 경우 생명 과정에서 일어나는 선택은 멘델의 원리에 따라 이런 종류의 유전자를 제거하는 대신 유리하게끔 활성화하고 그 확산을 도모하게 된다. 그 예로 아마 치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

 모부스Morbus 치매는 무엇보다도 특정한 뇌 부위의 손상 때문에 일어나는데, 다른 영장류들은 모부스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모부스 치매로 손상될 뇌 부위가 없기 때문이다. 모부스 치매에서 손상되는 뇌 부위들은 발생사적으로 진화의 가장 최근 단계에서 생겼다. 따라서 모부스 치매는 진화론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있다고 봐야 한다. 모부스 치매는 두뇌 특정 부위의 손상에서 비롯한 후천적 정신박약이라는 결손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환자들이 아마도 생애과정에서 아주 밀접하게 상호 연결된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잘 준비된(발달된) 뇌를 아주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유전자가 없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지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해석은 입증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는 추측일 뿐이다.


374~375p


 결핵을 앓는 경우 신체로 철분이 유입되는 것을 중단하거나 막게끔 환자들에게 철저히 일러 주는 일은 진화론에 기초해 볼 때 아주 과학적인 결정이다. 독감에 걸렸을 때 철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햄이나 달걀같은 음식에 입맛이 당기지 않는 것은 진화론이 제공하는 의학적 관점에서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독감 환자들은 토스트나 차에 입맛을 느끼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이런 음식에 철분이 적고 그래서 독감 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377p


 물론 이러한 진화론적인 사고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인류의 인식 능력에 대한 진화론적인 해석은 오직 직관적인 것 또는 인류의 감각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타당하며, 이를 넘어서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론을 도입하면, 언제나 끼워맞추기식 설명이 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해서 진화론이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이것이 창조론에 대립하는 사상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화론에 대한 오해를 다룬 부분을 마지막으로 첨부하고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종의 기원>과 관련해 일어난 많은 논란은 크게 세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구체적인 인간의 기원과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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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학자 계층에서까지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인간의 모계와 부계 중 어느 쪽 유래가 원숭이인지를 두고 논의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윈 이론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는 진화론이 <성경>에 쓰인 창조 행위와 대립하는 사상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정점에 올랐다. 그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성경>을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간단히 치부했기 때문에, 다윈의 사상이 <성경>의 창조론과 대립하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고 했다. 그들의 편협한 세계관은, 다윈의 진화론과 <성경>의 창조론은 대립 관계가 아니며 각각 학문적 표현과 문학적 표현이고, 양자가 인류의 비밀을 푸는데 상보적 구실을 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특별한 위치를 역설하는 부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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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가 덜 된 하등동물들은 생존경쟁이라는 생물학적 법칙에 끌려가지만, 진화된 인간은 기독교의 이웃 사랑이라는 이념을 통해 생물학적 진화와 반대의 길을 갈 수 있다. 이렇게 다윈의 생물학적 의미상 진화를 사회적 · 정치적으로 해석한 이들은 우생학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자연선택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세 번째 경향은 모든 생물의 진화가 지금도 진행 중이고 인간도 그렇다는 사실과 맞물려 있다. 진화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고, 인간도 그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에서 진화된 종족이듯 미래에는 인간이 아닌 좀 더 진화된 후손이 등장할 것이다. 이 말을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이라는 종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존재다. 이 관점은 니체의 초인 사상과 유사하다.

 이 모든 논의가 다윈이 전달하려고 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다윈은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자신의 사상과 <성경>이 대립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게다가 그는 책 말미에 자연에서 창조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 썼다.


 다양한 꽃으로 가득한 평야를 바라보았을 때의 경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곳에는 노래하는 새들과 무수한 곤충들이 있고, 습기 찬 땅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도 있다. 그들은 마치 인공적으로 그렇게 설계한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법칙 속에서 어울려 산다. (...) 이런 모든 모습을 보는 것은 숭고함을 일으킨다. 마치 우리의 지구가 만류인력에 따라 공전하는 것처럼, 창조주가 태초에 우리를 둘러싼 생명들에 이런 법칙성을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답고 놀랄 만한 형태들의 탄생과 점점 더 다양한 생물들의 탄생 과정을 만들어 나가는 그 법칙성을.


340~342p



위의 글은 2015년 10월 19일 네이버 블로그에 직접 게재했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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