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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가설을 먹고 자라는 과학


 『코스모스』에서는 책 전반에 걸쳐 다수의 과학자 혹은 사상가들에 대한 일화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그들이 일궈낸 성과 등을 다루고 있는데, 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과학이 현재까지 어떠한 방식에 의해 발전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케플러는 책에서 특히 비중있게 다루어졌던 인물 중 한 명인데, 그가 처음에 어떠한 발상에서 연구를 시작했고, 행성의 공전주기와 궤도 반지름의 관계를 밝혀내기까지 그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그 외 수많은 과학자들 또한 어떻게 그들의 업적을 이뤄냈는지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케플러는 태양계 구조의 근본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행성 사이의 간격이 정다면체의 수학적 특성과 연관돼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추측의 배경에는 정다면체의 종류 역시 유한하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정다각형을 면으로 해서 만들 수 있는 정다면체는 소위 '플라톤의 입체'라고 알려진 다섯 가지밖에 없다. ... 케플러는 가능한 정다면체의 가짓수와 행성의 수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행성이 여섯 개밖에 없는 '까닭'은 가능한 정다면체가 다섯 가지뿐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다면체는 다른 정다면체 안에 꼭 맞게 들어갈 수 있다. 정다면체들의 이러한 관계가 태양과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결정한다면 완전한 형상인 정다면체를 통해서 행성의 상대 배치에 숨겨진 근본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케플러는 행성의 여섯 개 구들을 유지해 주는 하나의 투명 구조물을 플라톤의 정다면체에서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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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 발견의 의미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하여 뷔르템베르크 공작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연구 제안서를 제출했다. 케플러는 그 제안서에서 내접된 정다면체 다섯 개의 3차원 모형을 제작함으로써 다른 이들도 그 거룩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128~129p


 그는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혼돈 안에 어떤 규범이나 법칙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이 신의 창조물이라면 세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신의 마음속에 있는 조화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126p


 케플러는 당시의 기술력의 한계로 인해 여섯 개의 행성밖에 발견되지 못했던 것을 이것이 전체 행성의 수라고 받아들였고, 당시 기하학과 정다면체, 정수와 같은 수학의 개념들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던 차에 이들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자의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주의 삼차원적 구조가 모두 밝혀진 현대에 와서 보면, 이는 터무니없는 믿음처럼 보이겠지만,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는 개념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던 당시의 케플러에게는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케플러가 제안했던 정다면체와 행성 간의 거리의 관계]


 케플러는 자신이 착안해낸 '신의 마음속에 있는 조화'로써의 행성간 거리의 법칙을 규명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연구에 투자했지만, 결국 자신의 가설이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튀코 브라헤가 죽은 뒤 케플러는 황실 수학자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완강하게 발뺌하는 튀코 브라헤의 친지들로부터 간신히 그의 관측자료를 얻어 냈다. 케플러는 행성들 궤도의 경계가 다섯 개의 플라톤 정다면체에 따라 정해진다고 가정하고 받은 자료를 분석하기 시작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튀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도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등이 발견되면서 "코스모스의 신비"는 완전히 그릇된 것으로 판명됐다. 이 행성들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결정해 줄 플라톤의 정다면체가 더 없었기 때문이다.


135p


 그러나 이러한 그의 믿음이 깨지게 된 사건은 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행성의 타원 운동, 즉,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을 발견하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결국 케플러는 원에 대한 동경이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구도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대로 과연 하나의 행성이었다. 그리고 케플러가 보기에 지구는, 전쟁, 질병, 굶주림과 온갖 불행으로 망가진, 확실히 완벽과는 아주 먼 존재였다. 이런 지구를 완벽하다고 믿었다면 나머지 행성들도 완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행성들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케플러는 고대 이래 행성이 지구처럼 불완전한 것들로 구성된 물체라고 이야기한 몇 안 되는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38~139p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은 자연 현상에서부터 직접 찾아낸 경험 법칙이었다. 케플러는 법칙을 자연에서 그저 캐낼 수 있었음에 만족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더 근본적인 행성 운동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다.


144p


 요하네스 케플러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는, 행성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천상 세계의 조화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 그가 죽고 36년이 지난 후에 결국 결실을 맺게 된다. 그것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연구를 통해서였다.


153p


 케플러가 그의 법칙을 발견해내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해보면 그는 ① 영감에 의한 '가설'에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② 가설이 틀렸음을 검증하였고, ③ 이 과정에서 축적한 지식과 자료들을 통해 새로운 법칙을 수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과학에 진보를 가져온 것은 한 개인의 천재적 지능보다도 (물론 수월하긴 하겠지만) 가설이 틀렸음에도 굴하지 않고 연구를 지속한 우직한 자세, 그리고 세속적인 부와 명성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진리를 규명하고자 했던 과학자의 정신에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가 가능하려면 사회적 분위기와 기반이 뒷받침되어야하며 과학 이외의 모든 학문 역시 과학적 영감의 토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코스모스』에서는 사회적 요소의 하나로 도서관을 제시하고 있으며, 과학이 처음으로 번성하여 꽃을 피웠던 국가로 이오니아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은 인간의 두뇌가 물리적 한계에 이르러 더 이상 학습 용적을 증가시킬 수 없자 외부로 진화된 '공유되는 뇌'이며, 연구자들은 도서관에서 선대에서부터 내려온 지식과 의지를 이어받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오니아는 지리적 요건이나 정치 체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과학이 어떻게 그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번성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표본이 되기에 중요합니다.


 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에도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그들도 과학과 만났을 것이다. 문화는 일정한 박자와 일정한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문화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나며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한다. 과학적 세계관은 우리 뇌의 가장 고등한 부분과 잘 들어맞고 그 부분을 아주 잘 설명하며 또 그 부분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기에 지구상의 그 어떤 문화권이라도 내버려 둔다면 언젠가 과학을 발견하게 되고 말 것이다. ... 그래도 최초는 있다. 그것이 바로 이오니아였다. 과학은 이오니아에서 태어났다.


346p


 이오니아 인들에게는 몇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우선 이오니아가 섬들을 중심으로 발달한 세계였다는 사실이다. 섬마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섬 생활에서 겪게 되는 고립은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다양성을 가져다주었다. 다양한 환경에 놓여 있는 여러 섬에서 다양한 정치 체제가 발달했다. ... 모든 섬들의 사회적, 지적 다양성을 하나로 묶을 만한 강력한 중앙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탐구가 가능했다. 따라서 미신을 조장해야 할 정치적 필요도 약했다.


344p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발전이 융성했던 국가는 그리 먼 과거로 돌아가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17세기의 네덜란드입니다.


 지혜와 꾀에 의존해서 살아야 했던 이 작은 나라의 외교 노선은 철저한 평화 정책이었다. 그들은 정통에서 벗어난 사조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했다. 마치 1930년대에 나치에게 쫓겨난 유럽 지식인들이 대거 망명해 오는 바람에 톡톡히 덕을 보았던 미국처럼, 온갖 검열로 사상의 자유를 억압받던 당시의 유럽 지성인들에게 네덜란드는 문자 그대로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17세기의 네덜란드는 아인슈타인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의 안식처일 수 있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수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데카르트Descartes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편 페인Paine, 해밀턴Hamilton, 애덤스Adams, 프랭클린Franklin, 제퍼슨Jefferson과 같이 철학적 성향의 혁명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정치학자 존 로크John Locke에게도 네덜란드는 안식처였다.


284p


 네덜란드 인들은 기술을 존중했으며, 사회 전체가 발명가를 제대로 평가하고 예우하는 분위기였다. ... 다른 나라에서 판매가 금지된 서적이라도 네덜란드에서는 출판이 허용됐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탐험의 정신과 낯선 사회와의 잦은 접촉은 자기만족의 타성을 송두리째 흔들어 사상가들로 하여금 사회 전반에 걸쳐 유효한 통념들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했다.


286p


 학문과 사상에 자유를 보장하던 당시의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조그만 땅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학문의 요람'이 되었는데, 이는 (비록 분단이라는 한계는 있겠지만) 현대의 한국에게도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떠한 사회적 분위기와 인프라에서 어떠한 과학자가 진보적인 성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여 살펴보았는데, 반대로 학계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보장되지 않고 학문이 폐쇄적이 되었을 때 혹은 경직되었을 때에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예로 피타고라스 학파가 있습니다.


 현대의 모든 과학 연구에서 필수적인 수학적 논증의 전통은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도 바로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우주를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 즉 코스모스로 봄으로써 우주를 인간의 이해 범주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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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학적 논증의 객관성 및 확실성에 매료돼 있었으며, 수학적 논증이야말로 인간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 최상의 인지 세계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증체계야말로 코스모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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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자신들의 수학을 통해서 완벽한 현실, 즉 신의 영역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여겼고,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은 완벽한 세계의 단지 불완전한 투영일 뿐이라고 생각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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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상충하는 관점들의 자유로운 대결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점은 모든 정통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경직성 때문에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신들의 오류를 고쳐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권위의 무게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주어진 문제의 답을 스승이 내린 판단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피타고라스학파에서 통용됐던 이와 같은 관행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364~366p



 피타고라스 학파는 이렇게 중요한 수학적 발견들을 외부와 공유하지 않았고, 2의 제곱근과 정십이면체에 관한 사실의 공표를 거부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발견은 외부 세계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과학 대중화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과학의 신성한 지식은 소수 집단의 전유물이며, 대중이 함부로 손대어 훼손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367~368p​


 결국 과학이 과학으로 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자기검증'이 필요하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순수한 접근과 이것을 용인하는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일 것입니다.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제시한 것만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제시한 가설들 중에도 훗날 틀렸다고 밝혀지는 것이 많다. 그러나 과학은 자기검증을 생명으로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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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은 자유로운 탐구 정신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했으며 자유로운 탐구가 곧 과학의 목적이다. 어떤 가설이든 그것이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 가설이 지니는 장점을 잘 따져 봐 주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생각을 억압하는 일은 종교나 정치에서는 흔히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취할 태도는 결코 아니다. 이런 자세의 과학이라면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누가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할지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자기 검증을 철저히 해야 한다.


195p


 그리고 과학 발전의 동력이 되어온 것을 단어 하나로 꼽자면, ​그것은 곧 '가설'일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1월 30일 네이버 블로그에 직접 게재했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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